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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규섭

우리도 씁니다 2021. 6. 15.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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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는 좀 쓸쓸하지만 해볼까?

너를 만나기 전 이야기야. 집에 들어가니까 심상치 않더군. 내가 보이자 식탁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던 누나와 이모, 그리고 엄마가 갑자기 어수선해졌어. 나는 물을 마시고 내 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았지. 똑똑똑. “야, 나와봐.” 누나가 노크했어. 나는 결국 부엌에서, 그러니까, 어떤 상황인지를 알게됐지. 음, 엄마가 병에 걸렸다는 얘기였어. “별거 아니야.” 이모가 별것 아닌 척 말하더군. 기가 막혔지. 이런 일이 우리 가족에게도 생기다니. 나는 방에 들어와서 다리가 풀려버렸어.

 

대학 병원에 갔어.

침대는 바퀴달린 침대로, 밥은 죽으로 바꼈어. 병실을 나가서 중앙홀로 가면 자판기가 있고 긴 의자와 환자들이 많아. 병원이라는 사실만 빼면, 입고 있는 옷이 환자복이라는 사실만 빼면 그곳은 버스 터미널 같았지. 손등 피부는 늘어져서 혈관이 다 드러난 할아버지, 흐리멍텅한 늙은 눈으로 집중하는 중년 여자, 주스를 깔짝대는 우유색 머리의 중년의 남자. 다들 뭘 하는지 알아? 뉴스와 드라마에 눈을 박고 있었어. 그런데, 그런 와중에 눈에 띄는 여자가 있었지. 뭔가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링거폴대를 비서처럼 옆에 두고 있었는데 비니를 쓰고 있었지. 그리고 나이 든 사람들과 매우 나이 든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만 어려보였어. 독보적으로.

 

이건 ‘반칙’ 아닌가 싶다.

그 여자의 길고 기이인- 미래가 싹뚝 잘려버린거잖아. 무언가를 준비할 나이에, 존경보다 보살핌을 받을 나이에, 몸에 자신감이 넘쳐야 할 나이에, ‘존나 의리없는’ 몸에 배신당한 처지니까. 여자는 주변 사람들의 은근한 동정을 받는 것 같았어. 그리고 가끔 핸드폰을 보면서 웃었는데, 옆에 있는 엄마와 똑같이 웃더라고. 누가봐도 모녀였지.

 

병실에 목사님이 찾아왔어.

그리고 엄마의 손을 잡고 우리를 창조한 분께 기도했지. 중얼중얼중얼.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도, 초등학생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시절로 돌아가서,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어. ‘아, 이럴때만 찾아서 죄송한데요, 이번만 넘겨주세요.’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들었어. 신은 전지전능하고 모든 것을 주관하는 존재라면, 병에 걸리게 해놓고 다시 낫게 해줄까? 라는 의문. 그리고 다 알고 계셨던 것 아닐까? 라는 의문.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먹을거라는 걸 모를리가 없잖아? 그러면 방관하신거 아닌가? 라는 의문.

 

아까 본 그 여자가 생각났어.

뭔지 알아? 온당치 못하다는 거야. 부당해. 의사가 심판이라고 해도 심판이 말리지 못하는 반칙은 있다는 걸 나도 알아. 그런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뭘 하셨지? 규섭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 여자애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었어. 지금 당장 대학병원 문을 발로 차고 나가서 또래들과 어울려야 했어. 왜 죽 긁어먹는 음울한 수저 소리만 가득한 곳에서 지내는거지? 그 여자 뿐인가? 소아병동에는? 아이들이 왜 거기에 있지? 숙제를 하고, 학원과 PC방에서 방황할 나이에 왜 다 큰 어른도 감당하지 못하는 무게를 감당하는거지? 그 무게 때문에 벌써 삶에 금이 ‘쩍’ 나버렸잖아. 아이들의 가족들은 아이들이 커피와 맥주 마시는 걸 볼 기회라도 있을까? 그리고 나는? 습관처럼 살다가 갑자기 결국 얼마 안남았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지? 하나님이 방관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에게 기댈 수 있을까? 대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거야? 궁금해. 괜찮다면 답장 해줄 수 있겠니?

 

수술 전날 저녁,

엄마는 그저 구원받고 싶다는 아주 인간적인 기도만 했어. ‘아멘’ 그 작은 단어에 목이 메었고 어머니는 더더욱 매달리고 있었지. 그 옆에서 나는 알로에 주스를 마시면서 핸드폰으로 생존률를 검색해보는 의미없는 짓거리를 했어. 그러다가 갑자기 바깥에서 ‘펑! 펑!’ 소리가 났는데, 창문을 열어보니 밤 하늘에 초록색 구름이 걸려 있었어. 밑에 있는 조명이 구름을 비췄나봐.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그 날이 대학교 축제였더라고. 소리는 불꽃놀이였을거야. 불꽃은 보이지 않았어. ‘탕!’, ‘펑!’ 이런 소리만 끈질기게 들렸어. 

 

 

 

 

by. 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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