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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2021. 3. 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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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드릴이 돌을 깨는 

희미한 소리가 들린다. 산이 끈질기게 으르렁댄다. 이곳은 장례(葬禮)의 문턱이다. 관리자가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다. “어, 그 사이 많이 자랐네.” 잠깐 동안 엄마와 이모는 입구 옆에 놓인 화분을 구경한다. 사라졌던 관리자가 들어오라 손짓한다. 우리는 복도를 걷는다. 고령화의 지린내와 베이비파우더가 섞인 눅눅한 냄새가 바닥을 기어 온다. 텔레비전 연속극 소리와 아기처럼 우는 어른의 소리가 천장을 기어간다. 우리는 병실에 들어선다.

 

1937년생

병명: 당뇨, 뇌경색, 신경통

참고: 연하곤란(dysphagia), 관절운동, 보청기관리, 체위변경, 통풍

 

이곳은 늙은이들이 누워있는 곳이다.

우리 할머니처럼. 이모와 엄마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을 건다. 눈을 뜬 할머니더러 말해보라고. 하지만 말이 없다. 한때 지성으로 빛났던 얼굴은 시들었고, 진부했던 파마는 군인처럼 짧게 깎여있다. 이는 몇 개 남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는 얼굴들을, 정말 모든 것이 쓰여있는 얼굴들을 천천히 본다. 그리고 그들의 침대에 붙어 있는 나이를 읽는다. 까마득한 나이. 식민지에서 결핍을 느끼며 자랐고, 광복을 기억하는 사람들. 열매를 따고 농사를 짓고 동물을 기르고 잡아먹은 사람들. 조선부터 4차 산업혁명까지 살아서 와이파이에 둘러 싸인 인생이라니. 이들은 인류가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경험을 가졌다. 그 사실이 나무 껍질 같은 주름에 쓰여있다.

 

우리 할머니는 느닷없이 태어난 것처럼,

느닷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이곳에 왔다. 나는 엄마와 몇 번 이곳에 왔었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의 우윳빛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는 이마에 키스했었다. 굴처럼 늙은 할머니의 눈동자는 나에게 쌩쌩했던 할머니를 생각하게 했다. 인생의 궤적에서 떨어지기 전의 모습. 할머니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나를 감싸 안았었다. 온화하던 이모부가 탕수육을 먹고 싶다고 칭얼대는 나에게 엄하게 소리 지른 후였다. 나는 이모부가 미워서 더 서럽게 울었고 할머니의 뱃살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 콧물을 닦았다. 할머니는 괜찮아, 괜찮아라며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냈고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그릇에 담고 흰밥을 꾹꾹 눌러 식탁에 놓고는 내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었다.

 

“긁어서 난 상처들이에요.” 간호사가 말했다.

지금도 할머니는 원숭이 같은 손으로 팔을 긁는다. 희미한 의식이라도, 맥 빠진 신체라도 간지러움은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르신, 누가 왔는지 보세요. 딸들이 오셨어요.” 간호사는 귀에 대고 크게 말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우리가 왔는지조차 모르는 듯하다. 이모가 열심히 말을 건다. “엄마, 엄마!” 하지만 딱 한 사람뿐, 대답 비슷한 걸 해주는 사람은 엉뚱하게도 옆 침상의 한 할머니다. 그녀는 멧돼지를 본듯, 발작하듯, 높은 곳에서 떨어진 듯 소리 지른다. 딱한 사람이었다.

 

이곳은 인간이 인간을 챙기는

장례(葬禮)의 문턱이다. 늙은이들이 벌채된 나무처럼 무너졌고 이곳에 와 있다. ‘생존’은 있으나 ‘삶’은 없다. 이들은 하나둘씩 떠나는 인생의 졸업생들이다. 남은 건 희미한 기억과 이상한 꿈, 회환과 보험비뿐이다. 이번엔 내가 할머니를 위에서 내려다본다. 생존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게 끝이구나, 결국 이거였구나.

 

 

 

 

by. 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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