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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야

이렇게 씁니다[3월 : '글쓰기'에 대하여]

우리도 씁니다 2021. 3. 24.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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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자 속도가 (상당히)느린 편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남들의 손을 보며 신기함은 느껴도 크게 부러움이나 경쟁심리가 작동하지 않았고, 입시 때까지도 컴퓨터로 하는 거라곤 몇 단어를 조합한 검색이나 게임이 다였다. 즐겼던 PC 게임 역시 각종 무기를 사용하며 팀원과의 빠른 소통이 필요한 콘텐츠보다는 자족(自足)감이면 충분한 것들이었기에 속도감 있는 타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자연과학부에 속한, 펜과 종이면 충분한 전공인 것도 그렇고, 수업 계획서 등을 찾아보며 팀플이나 리포트 위주의 과제가 거의 없는 수업들을 교양으로 채웠기에 졸업을 위한 학기들의 반이 끝날 때까지도 타자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섯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다, 상대적으로 리포트리포트 대체 시험이 많은 복수 전공을 시작하며 빠른 타자의 필요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역시 고난이 있어야 성장이 있나 보다. 괴로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를 통해 타자 속도가 상당히 늘고, 그 이후 시작했던 과제 이외의 글 역시 지속적인 도움이 되었다.(지금 쓰는 이런 글 역시 과정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글을 쓰기 전 정리하는 것 역시 펜이 아닌 문서 작업을 통해 진행하기 시작했다. 작업 속도 역시 빨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펜으로 정리하던 때보다 머릿속에 있던 내용을 빼먹은 경우가 많아졌고, 탈고까지는 더 많은 퇴고가 필요했다. 쓸데없는 문단이나 문장들 역시 자주 눈에 띄었다.

 

2.

핸드폰 배터리가 거의 없었다. 유튜브는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배터리를 덜 잡아먹는 메모장 역시 쓸 수 없을 만큼이었다. 하필 읽고 있던 책 역시 집에 두고 왔었다. 그렇게 많은 정거장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을 가만히 앉아 보내기 아까웠다.(집에서는 왜 이런 생각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가방 안에는 메모장과 펜이 있었고, 정리해두었던 글을 쓰기로 했다. 오랜만에 펜으로 시작한 글이었지만, 지하철에서의 시간은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쓴 글을 그대로 노트북 화면에 적기 시작했다. 이 역시 일종의 기록이자 정리를 위한 순간으로 생각했지만, 다 적어놓고 나니 그 서너 문단에는 평소보다 퇴고의 필요성이 줄어있었다.

 

생각해보니 빨라진 타자는 초고를 만들어내는 작업 시간은 줄였지만, 내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로 끝나는 문장 하나를 완성해버리곤 다음 문장을 강요하며, 다음 문장에 필요한 생각이나 어긋난 생각을 유도했다. 덕분에 한 문장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은 두세 문장이 되어버리고, 머릿속에 있던 생각이나 문장은 화면 속 문장들 사이에서 미아가 되어 퇴고 시간이 되어서야 발견되는 경우가 잦았다. 게다가 그들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엔 이미 문단이 너무 촘촘해진 뒤인 경우도 있었다. 작문의 속도가 생각의 그것을 넘어서 버린 것이다.

 

3.

오늘도 지하철을 기다리며 메모장과 펜을 꺼냈다. 물론 쓰려는 모든 글들을 펜으로 쓸 수는 없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의 손 글은 늘 악필의 순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루라도 빠르게 시작한 한 문장은 부지런히 문단을 만들어냈고, 덕분에 작업 속도가 더 (효율적으로)빨라진 듯했다. 또한 유튜브를 보거나 괜히 핸드폰 화면을 켰다 껐다하는, 잠들기 전에 모여 오늘의 후회를 만들어내는 그 시간들이 줄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아이패드를 추천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글은 펜으로 써야지라고 담백하게 대답하는 상상을 했다.

 

 

 

 

by. 환야

 

 

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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