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씁니다
전기장판은 꺼져 있었다 본문
시험 기간이었다. 대부분 시험이 리포트로 대체되었고,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측면에서 글을 진행해봐야겠다는 이유로 핸드폰을 켜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살피고 있었다. 아쉽지만 유튜브에는 A+를 받을만한 신선한 접근법이 나와 있지 않았다. 물론 검색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고, 다양한 분야로 안내하던 알고리즘은 글의 수준을 높여줄 만한 영상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영상을 찾을 수 없어 다음으로는 이런저런 커뮤니티의 글들을 살폈다. 유머가 가미될수록 글의 흥미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선택한 것은 ‘유머 게시판’이었고, 재미있는 글 하나를 발견했다.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캡처해 온 듯한 글의 제목은 ‘20대 후반에 깨달은 것’이었고, 내용은 대인관계, 체력관리 등을 포함한 다섯 가지로 된 조언 또는 일종의 원칙들이었다. 나 역시 최근 들어 생각하기 시작했던 삶의 태도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고, 꼭 시험 기간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흥미를 갖고 볼 수 있는 짧은 글이었다. 그리고 다음 캡처에는 댓글이 있었다. 베스트로 등록된 댓글을 제일 처음 볼 수 있었는데, 30대가 되면 깨닫는 것은 20대 때 뭔가를 깨달았다고 숫자 적으며 원칙을 나열한 게 상당히 창피하다는 내용이었다. 좋은 취지로 조언을 하려던 누군가에게 초를 치는 댓글로 보일 수 있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대학을 입학하며 고등학생 때 가져야 할 태도나 마음가짐을 정리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이 되면 그 전까지의 대학 생활에서 대인관계나 미래 계획에 대한 태도를 어떤 식으로 설계해야 할지를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아직 숫자를 쓰며 원칙들을 작성하지 않았다.
곧 뭔가를 깨달았다는 착각 때문에 아직까지 후회하고 있는 대학 새내기 때의 일이 생각나 버렸다. 그날 밤, MT 뒷풀이를 마치고 상당히 취한 채로 선배 형들과 지하철에 올랐다. 내 옆에는 08학번인 조장이었던 형이 앉았고, 평소에 영화 이야기를 곧잘 하던 나에게 자신도 영화를 많이 봤다며 일종의 ‘영화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영화적 지식이 그 지하철에 탄 그 누구보다 더 낫다고 생각(착각)하고 있던 나는 그에게 대화의 어느 지점에서 ‘그래도 저한테는 안 되실걸요.’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는 약간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사람마다 영화를 보는 방식이 다른데, 거기서 어떤 우열을 가리는 것은 힘들지 않겠냐고, 친절하게 답했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의 성숙한 관점과 나의 우둔함 때문이었다. 잠시 술도 확 깼었던 것 같다.
가끔 생각나는 일화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때를 생각하며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쉰다. 지금의 나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그 형이, 나보다 영화를 더 잘 이해했으면 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술 영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고작 수십 편을 보고, 몇 평론가들의 글을 읽고 그게 내 생각이라 착각했던 나는, 그렇게 뭔가를 깨달았다며 ‘우매함의 봉우리’에 서 있던 것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끄고 자동으로 꺼진 노트북을 재가동했다. 예상보다 좀 더 효과적인 집중을 발휘해 두 개의 리포트를 완성했다. 자정이 넘어있었고 곧바로 잠을 청했다. 누운 지 1분쯤 되었을까,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확 걷어찼다. 켜 놓았던 전기장판 때문에 좀 더웠던 것 같다.
by. 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