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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답장이 늦었어. 4년 전부터 서로 많은 대화가 있어왔고, 그만큼 쓸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알맞은 내용을 고르느라 늦었다는, 이런 변명을 이해해줘.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해 볼 기회를 만들어줘서 고마워. 두괄식 표현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가장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해온 게 있어. 우리가 처음 대화했을 때 언급한 ‘이동진’ 영화 평론가의 블로그에 장식된 말이기도 해. ‘하루하루 성실히,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계획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후회와 동행하는 횟수를 줄여줬거든. 무작정 시작한 걷기가 탄력을 받아 달림으로 발전하는 게 좋았어.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방향을 몰라 길을 잃고 그저 고생으로 끝나버려 후회로 남았던 게 사실이야. 그래서 잠시 멈추고 뒤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
그러니까, 4년이 지났다는 거지? 훈련소에서 만난 게 17년도였으니까. 우리 둘 다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였고 동갑이었지. 훈련소 식당에서 내가 이렇게 물었어. 영화 좋아하냐고. 너는 고개를 끄덕였어. 마침 심심한데 잘 됐다 싶었고 밥을 먹으면서 영화 얘기를 했지. 얘기가 잘 통했어. 그래서 나는 너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평론가 ‘이동진’을 아냐고 물었지. 너는 이렇게 대답했어. “GV에서 여러 번 봤죠” 알고 보니 너는 영화에 미친 사람이었어. 암막과 밤하늘, 두 종류의 천장밖에 없었던 영화광. 그날 이후로 4주의 훈련은 영화와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어. 그때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어떤 포만감을 느꼈던 것 같아. 아, 그리고 수학 이야기도 했었지. 진짜 흥미로운 건 너의 전공이었..
‘1시간 10분’ 대충 예상한 시간이다. 환승할 필요도 없고 날씨도 좋아 선택한 버스. 하지만 그 긴 시간 때문에 가져온 책도, 창밖도 보지 않는다. 자리가 생겨 앉자마자 유튜브를 꺼냈고 자연스럽게 알고리즘을 따라간다. 하긴, 차 안에서 책을 보다 어지러워 멀미가 났던 경험이 있다. 책은 이따 지하철을 타며 보기로 했다. 창밖, 처음 보는 비슷한 건물들의 연속일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유익한 영상시청 시간을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결국 이미 봤던 영상들에까지 손을 뻗는다. 2년 전에 개봉한 영화 의 하이라이트 액션 영상까지 클릭하게 되었다. 액션을 하는 주인공의 배경 속 조연들 몸짓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썼는지, 힘을 숨기고 있던 주인공들의 모습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장르적으로 표현했는지를 평가할 생각에..
1. 꽤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지지만, 지금처럼 온라인이 아닌 교실에서, 사회적 거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며 수업을 들을 수 있던 때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꼭 들어야 하는 전공 수업들 이외에는 다양한 분야의 수업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대학생 딱지를 붙인 지 몇 학기 지나지 않았을 때까진, 전공은 경제학이지만 음악을 하겠다 마음먹은 나의 시간표엔 ‘문학’과 ‘철학’이 들어간 강의가 빠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마음으로 아무 노래나 만들고 싶지 않았다. 노래를 발표한다는 것은 책을 출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남는 흔적이 생기는 것이니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부끄럽지 않았으면 했다. 그럼에도 졸작을 내어 놓은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지만, 서툴고 어리숙했을지언정 최선이었다는 마음..
모범생(模範生) :학업이나 품행이 본받을 만한 학생 ‘모범생’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초중고 시절처럼 ‘타에 모범이 되는 기준’이 상대적으로 명확한 때가 아닌, 대학교에 입학한 뒤 두 번이나 각기 다른 교수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칭찬이야 어쨌든 기분 좋은 게 사실이고, 게다가 당시 전공보다 좀 더 흥미와 열정을 가졌던 타전공 교수님들의 말씀이었기에 이렇게 글 쓰는 순간으로까지 이어진 듯하다. 처음 그 단어를 듣게 된 강의는 실습 위주의 형식이었다. 그 강의에서는 매주 실습한 내용을 각자 적어 정리한 뒤 학기 마지막 주에 제출해야 했고, 해당 과제의 서식은 학기 초에 교수님께서 미리 올려주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팀플’이었고,(단편영화 한 편을 만드는 수업이었다.) 실습 경험이 전혀 없었..
압구정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집에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곳으로 영화를 보러 간 이유는 영화가 끝나고 약 2시간 정도 진행되는 평론가의 해설 때문이다. 주말이었고, 영화 시간과 비슷한 2시간 동안 해설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 생각나는 평론가가 있다면 이 글이 좀 더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참고로 이 평론가의 제일 길었던 해설 시간은 약 5시간으로 알고 있다.) 심오한 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단순한(것처럼 보이는) 작품이었다. 병에 걸린 소녀가 등장하고, 성실과는 거리가 먼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 뒤, 삶이 끝나기 전까지 사랑하는, 뭐 그런 내용이다. 제목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를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그날 나와 같은 공간에서 해설을 들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만큼 어디서 분명 본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