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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액이 부족합니다

우리도 씁니다 2021. 4. 2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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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10

대충 예상한 시간이다. 환승할 필요도 없고 날씨도 좋아 선택한 버스. 하지만 그 긴 시간 때문에 가져온 책도, 창밖도 보지 않는다. 자리가 생겨 앉자마자 유튜브를 꺼냈고 자연스럽게 알고리즘을 따라간다. 하긴, 차 안에서 책을 보다 어지러워 멀미가 났던 경험이 있다. 책은 이따 지하철을 타며 보기로 했다. 창밖, 처음 보는 비슷한 건물들의 연속일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유익한 영상시청 시간을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결국 이미 봤던 영상들에까지 손을 뻗는다.

 

2년 전에 개봉한 영화 <극한직업>의 하이라이트 액션 영상까지 클릭하게 되었다. 액션을 하는 주인공의 배경 속 조연들 몸짓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썼는지, 힘을 숨기고 있던 주인공들의 모습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장르적으로 표현했는지를 평가할 생각에 썸네일을 눌렀던 것 같다. 그리고 마스크로 가려진 입꼬리가 내려갔다. 찌푸려진 미간은 영상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일순간 울컥 뭔가가 나오려는 것을 참으려는 신호였다. 재작년 대형 스크린 앞에서 튀어나왔던 반응과 달랐다.

 

단순히 장르적인 쾌감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 강도로 치면 차라리 슈퍼 히어로영화들의 클립들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작품 속 캐릭터들의 서사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그런 능력(?)을 가진 이들이 주변으로부터 무시당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버텨왔다는 서사적 사실이 바로 그 촉발제였다. ‘누구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닌, ‘대단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현실에서는 그저 버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슬퍼졌다. 단순히 금전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 어른들의 삶이, 사실 진짜 어른의 삶이었다.

 

몇 달 전 한 영화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다. 직접 번 돈 몇 천만 원을 가지고 독립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해당 작품은 서울독립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나에게도 그해의 가장 좋은 한국 영화 중 하나였다.) ‘축하해, 이제 영화 해야겠네.’ 감독이 수상 이후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다음과 같다. ‘지금의 내 삶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는데, 세상은 영화 만들기를 더 대단한 것으로 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지하철 환승을 하며 통로 벽에 새겨진 무늬들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최소한의 미학과 함께 통로 끝까지 이어져 있다. ‘노동이라는 메시지가 담긴 예술품을 보며 감명을 받는 어제까지의 내가 떠오른다. 거짓된 반응. 노동 자체인 이 통로의 무늬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물론, 이것도 거짓.

 

아직 멀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고, 그것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게 맞다고 판단만 할 뿐이었다.

’, 개찰구에서 소리가 들렸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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