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씁니다
어쩌다 씁니다 본문
1.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된 후, 그러니까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그리고 제대로 책 한 권을 완독했다. 교복을 입었을 땐 뭐 했냐고? 독후감은 인터넷에서 긁어와서 완성했고 점심시간에 책을 읽는 사람이 ‘쿨’ 하지 못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히 책은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 남은 건 핸드폰 뿐이었고 기사를 보다가 영화 평론가가 추천해 주는 책에 대한 글을 봤다. 천명관의 「고래」, 정유정의 「7년의 밤」 이었다. 뭐라더라, ‘2000년대에 나온 가장 재밌는 소설’ 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다음 날 도서관으로 갔다. 처음으로 회원카드를 만들고 앞의 두 책과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빌렸다. 어땠냐고? 새벽까지 다리를 덜덜 떨면서, 감탄을 하면서, 한숨을 쉬면서 읽었다. 뒤로 갈수록 가슴이 너무 뛰어서 손가락으로 넘기는 한 장, 한 장이 무거웠다. 책이 재미없는 게 아니라 내가 재밌는 책을 못 읽은 거였구나, 라고 느꼈다.
2.
“남는 건 사진밖에 없는 것 같아.” 내가 애정하는 중년 여자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진 속 여자는 세월에 의해 이목구비가 뭉툭해지기 전이었고 청바지에 가죽재킷을 입고 있었다. “읽은 것은 증발하는 것 같아.”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글을 눈(eye)의 홍채에 쏟아부어도 뇌에 박히는 것은 몇 문장, 몇 장면일 뿐이었고 그것마저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슬고 벗겨지고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꿈처럼 사라졌다. 아까웠다. 삶의 순간을 사진으로 붙잡았듯이, 독서의 순간을 붙잡고 싶었다. 그래서 메모를 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화질이 좋지 않은 사진처럼 완벽하지 않은 메모였지만 책을 통째로 손 위에 올려놓고 비비고 굴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기한 것은 메모지가 쌓이니 메모지끼리 화학반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것과 반대되고, 이것은 저것과 비슷하네, 라는 식으로.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글을 써서 알리고 싶은 욕구를 느낀 게.
3.
뭐, 그래서 어쩌다 쓰게되었다.
by. 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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