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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아직 추운 날이었다. 지나가는 대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어색한 밤이었다. 젖은 바닥을 긁으며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렸다. 준비한 말이 나오려다 목에 걸려 대롱대롱 흔들렸다. 다음에 말할까? 아니다. 오늘은 말해야 한다. 저기 걸어오는 학생들이 지나가고 나면 이야기해야지. 저기 보이는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이야기해야지. 해야지, 해야지. 쑤욱. 내 팔 속으로 너의 팔이 들어왔다.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나의 말이 나왔다. “우리 사귈래?” “그래.” 고개를 돌려 너를 보지는 못했지만 너는 소리 없이 웃었다. “오늘 그 말을 하려고 했어?” 너가 물었다. “아니. 다른 말을 하려고 했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너가 다시 물었다. “나 너 좋아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너를 봤지만 너가 ..
어렸을 때 내가 쓰던 물건들은 대부분 누군가가 쓰던 물건들이었다. 형이 입었던 바지, 옆집 형이 탔던 자전거, 아래층 누나가 가지고 놀았던 소꿉놀이 세트를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가 물려받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제일 먼저 태어났더라면…’하고 생각했다. 내가 제일 먼저 태어났으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을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사야했을 테니까. 항상 남이 사용하던 물건을 썼기 때문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물건을 동경했다. TV 광고에 나온 장난감은 완벽해 보였다. 글라스데코는 한 번도 짜지 않아 꽉 차 있었고 소꿉놀이 세트는 빳빳한 박스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완벽한 물건을 어떻게 사용했길래 옆집 형과 아래층 누나는 물건에 때를 입혔을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것..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 롯데타워. 높은 건물은 어디에서나 눈에 띄어서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롯데타워는 어디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가까이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지하철에 연결된 지하도를 통해서, 지하주차장의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건물에 들어가니 거대한 건물을 실제로 보기는 쉽지 않다. 롯데타워 뿐만이 아니라 다른 거대 구조물도 마찬가지다. 서울에 있는 대교, 고가도로, 높은 빌딩, 한강의 크기를 느낄 기회는 많지 않다. 언제나 차를 타고 거대 구조물을 지나치니까. 거대 구조물의 크기를 느끼기 위해서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너본 적이 있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지날 때는 1분 만에 건널 수 있었는데 걸어서 건너려니 15분이 넘게 걸렸다. 대교大橋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
를 기억하시나요. 자리를 옮기며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일몰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행성을 떠나온 어린왕자를 기억하시나요. 어린왕자가 지구에 도착하기 전에 다섯 개의 행성에서 다섯 명의 어른들을 만났던 것도 기억하시나요? 성인이 된 지 몇 년이 지난 이제는 나는 이 다섯 명의 어른 중 어떤 어른과 닮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지리학자인 거 같아요. 지리학자는 커다란 화산은 탐구하지만 덧없는 꽃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습니다. 직접 탐험하지 않고 탐험가에게 물어볼 뿐입니다. 어느 순간 저도 지리학자같은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화산처럼 거창해졌어요. 직접 겪은 일을 이야기하지 않고 어려워 보이는 책 속 문장을 이야기해요. 그래서 자주, 제 앞에서 동공이 풀린 채 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