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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다[12월 : 비에 대하여] 본문

김도겸

비를 맞다[12월 : 비에 대하여]

우리도 씁니다 2021. 1. 4.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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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왕년에는박은 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 맞았어.” 

 “? 학점 말하는 거야?” 나는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 너가 비만 많이 맞았냐? 씨도 많이 맞았지. 아주 흠씬 두들겨 맞았지.” 전이 술집의 시끌벅적한 소음에 더하며 외쳤다

 “아니! 레인 말하는 거잖아. 하늘에서 내리는 레인.” 박이 웃으며 말했다. “대학생 때는 맞는 좋아했거든. 아니 지금도 싫어하지는 않아. 오히려 맞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비를 맞으려면 작정을 해야 한단 말이지. 포마드스타일로 머리를 빗어 올리고 왁스를 바르면서, 가방에 512기가바이트 맥북 프로를 들고 다니면서, 천연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으면서, 결정적으로 자동차를 타면서 비를 맞을 없게 되어 버렸어.” 

대학 시절에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다. 모든 테이블이 차돌된장찌개만 시켜서 술을 마시는 학생들로 가득 차돌박이 집이 우리의 단골 가게였다. 가끔씩 차돌박이를 시키는 사람이 있으면 놀라는 아주머니와, 차돌박이를 먹으려면 3 전에 주문해야 한다는 소문이 학생들을 끌었다

 박의 가방은 언제나 비어 있었다. 번은 박이 생일을 맞아 우리에게 술을 사겠다며 차돌박이 집에 데리고 갔다. 술을 먹고는 가방에서 지갑을 찾을 없다며 우리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마침 전과 나도 돈이 부족했다. 어쩔 없이 우리는 술값 대신 박의 가방을 맡겨 놓고 떠났다. 박은 가방에 주민등록증밖에 없다며 동안 가방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 덕분에 박은 동안 가방 없이 학교에 다녔다

 박은 가방을 찾아오지는 않으면서 다른 가게에서 술은 마셨다. 그러다 하루는 취한 나와 전이 마찬가지로 취한 박을 차돌박이 집으로 데려갔다. 박은 어쩔 없이 외상값을 지불하고 가방을 찾아와야 했다. 박은 이렇게 김에 본전을 뽑아야 한다며 계속해서 마셨다. 아침 해가 밝아올 즈음 우리는 만취해서 바닥에 누워 자버렸다. 사장님은 그런 우리에게 거적 하나 걸쳐주지 않고 문을 닫고 퇴근해 버리셨다

유리문 너머로 햇빛이 우리를 덥혔고 우리는 항복하듯이 일어나야 했다. 수업이 있었지만 박의 자취방으로 가서 잠을 잤다. 숙취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대학시절 박은 언제나 젖어도 무방했을 거다. 가방에 없으니 비에 젖어도 샤워를 하고 옷을 말리기만 하면 된다. 생각해보니 박이 우산을 쓰고 있는 모습을 적이 없는 같다

 “너가 그냥 우산 챙기기 귀찮아했던 아니야?” 

 “, 그것도 맞는데 맞는 좋아하는 것도 맞아. 우산이 가방에 있어도 썼으니까. 물론 가방에 우산이 있었던 적이 거의 없지만.” 박은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웃었다

 “ 나는 얘가 맞는 있잖아. 얘가 맞는 모습 굉장해. 너가 없었던 보면 너가 영화 찍을 때였나 보다.” 

 영화를 전공하던 나는 가끔 영화를 찍느라 술을 먹지 못했다. 전이 이야기하는 그날은 나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재산 500 원을 졸업 영화에 쏟았다. 2011 6 말에 태풍 메아리가 어떤 대륙도 거치지 않고 한반도에 닿았다. 하필이면 내가 졸업 영화를 찍을 기록 이후 최다 강수량을 기록했다. 비만 왔으면 대본을 수정해서 촬영을 했겠지만 바람까지 불어닥치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없이 촬영을 다음 달로 미뤘다. 500 원을 태풍으로 날리고 어쩔 없이 대출을 받았다. 7월에도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어쩔 없이 빗속에서 촬영했다

 박의 이야기를 내가 들을 없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거다. 500 원을 날리고 500 원을 새로 대출받은 앞에서 박의 이야기를 틈이 없었으리라

 전이 전하는 이야기는 이랬다. 내가 태풍 속에서 망연자실해 있을 , 전과 박은 어김없이 술을 마시러 차돌박이 집에 갔다. 태풍이 불어닥치는 차돌박이 집은 한산했다. 비바람이 가게 유리를 흔들어댔다. 전과 박은 소리를 들으며 새벽까지 마셨다. 자정이 넘었을 , 전이 화장실에 갔다 오니 박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은 박이 전에 계산을 하고 나갔다고 알려줬다

걱정이 돼서 급하게 나가보니 박은 가게 바로 옆에 있었다. 가로등 밑에 똑바로 서서 비를 맞고 있었다. 쏟아지는 장대비에 박의 밑으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비가 어찌나 거센지 박을 때린 빗방울은 수십 개의 물방울로 갈라졌다. 흰색 티셔츠가 젖어서 그의 속살을 비추고 있었다. 굴곡 많은 박의 몸매가 드러났다. 오직 프린트된 ‘Guess’ 로고만 그의 가슴팍에 남겨져 있었다

전이 박에게 씌워주려고 우산을 펼쳤지만 바람이 불어서 우산이 뒤로 뒤집혔다. 전은 뒤돌아서 우산을 접으려고 끙끙댔다. 그러는 동안 전의 등이 축축하게 젖었다. 전이 우산을 접고 다시 뒤돌았을 , 박은 자리에 누워 있었다. 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가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로등이 박을 비췄다. 그의 눈은 항의하지 않았고, 요구하지 않았다. 현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전이 신기한 광경에 넋을 잃고 있는데 박이 갑자기 일어나서는 말했다. “가자.” 가방에서 물이 길게 떨어졌다. 양손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전은 박을 따라 걸었다

박의 열변에 따르면 박은 종종 그렇게 비를 맞았다. 우리가 심드렁하게 듣고 있으니 박은 좀처럼 높이지 않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아 알겠다.” 전이 그의 말을 끊으며 술잔을 들었다. 술잔을 들이키고 박이 말했다. “ 피곤하다.” 

그러게. 이제 들어갈까.” 우리는 11시에 호프 집을 나왔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가을이 얼굴을 들이밀더니 겨울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는 듯이 뻔뻔하게 들이 앉아 있었다. 눈이 되지 못한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이 조금 추웠으면 눈이 됐을 텐데. 괜히 입김을 불어본다. “춥다.” 전이 코트 속으로 얼굴을 박으며 말했다. “나는 먼저 들어갈게.” 전이 택시를 잡아타고 먼저 들어갔다. 나는 박의 차를 얻어 타기 위해 대리기사를 기다렸다. 대리기사가 도착하고 우리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창문에 서린 김을 손가락 끝으로 눌러 녹이고 틈으로 바깥을 엿봤다. 커플이 보슬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커플을 따라서 손가락을 움직여 김을 지웠다. 둘은 서로를 껴안은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없을 전부 가진 척해야 .” 박이 말했다. 영화 <알라딘>에서 알라딘이 대사였다. “조금 가지니까 전부 가진 척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졌어. 사실은 아무것도 가진 없는 건데.” 

나는 창문에 서린 김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창문에 박의 얼굴이 비쳤다. 창문에 묻은 보슬비는 박의 얼굴을 적시지 못했다

 

 

 

 

by. 김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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