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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그러니 말하자면 ‘우산 빌런’이다. 아, 좀 더 정확히는 ‘장(長)우산 빌런’이 맞겠다. 팔을 내리고 우산을, 그것도 장우산을 가로로 들고 다니는 이들. 물먹은 우산이 행여 ‘남에게 닿을까.’, ‘나에게 닿을까.’ 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는데, 그 사이에서 굳이 또 우산을 가로로 들고 자신감 있게 팔을 휘젓는다. 올라가는 계단에서는 위험하기까지. 덕분에 탈 수 있던 열차 하나를 놓친 적도 있다. ‘왜 저럴까.’, 생기는 불가피한 의문. 이어진 가설, 혹시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위협을 가하려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일까. 썩 좋지 않은 그들의 모습과 내 기억들로 구축된 확증편향일지라도, 영역 확장의 욕망이라는 기반을 가지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장우산의 사용 빈도와 나이는 비례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활동..
‘참 성실하다.’ 생각이 들었다.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에 쫓기지 않는 하루를 보냈던 비 내리는 날, 문득 든 생각이다. 비는 내리는 양에 맞는 소리를 낸다. 소심하게 자신에게 걸맞은 소리를 못 내지도, 위상을 드러내려는 듯한 과장을 하지도 않는다. 제 분수를 지키며, 자기의 소리를 내는 것들은 성실한 것들이다. 창을 열고 그 소리를 직접 들으며 내리는 양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창밖에서부터 들리는 그 소리를 듣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며 든 여러 단상들이다. 1. 비와의 대조 우리는 보통 앞으로 나아간다. ‘나 갈게!’라 말하며 굳이 방향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앞으로’를 전제한다. 혹 뒤로 가게 되면, 그런 예외 상황이 생겼을 때가 되어야, 방향을 이야기한다. 잠시 생각해..
장마였다. 올해 장마는 특히 길었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나는 태풍의 이름만 세 개 정도이니 단순히 긴 장마가 아니었다. 그리고 하필 그 시기에 촬영이 있었다. 덕분에 체감상 그 기간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8월이 시작되면 세찬 비까지 내리지는 않을 거라 감히 예상했고, 주간 일기 예보에 뜬 먹구름들은 예측하기 힘든 시기에 대한 기상청의 귀찮음을 대변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촬영 일주일 전, 비가 계속 올 거라는 일기 예보를 보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그때 되면 안 오겠지.” 테스트 촬영을 위해 모인 스태프들은 서로 이렇게 위로했다. 아니, 나를 위로했다. 나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지만, 첫 연출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연출이었고, 졸업 영화라는 타이틀은 ‘될 대로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