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이야기 (3)
우리도 씁니다
“핸드폰 앞자리가 ‘010’이 아닌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가 봐.” 그녀가 말했다. “그럼 ‘투지폰’을 쓴다는 거 아니야? 안 불편한가?” 내가 반응했다. “불편해도 쓰는 거면, 왜 쓰는 거 같아?”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 핸드폰을 샀던 게 생각났다. 돌이켜보면 그 전까지 내가 불편한 것은 거의 없었다. 다만 연락이 안 될 때마다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불편했을 뿐.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젠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메신저들이 누군가에겐 ‘가져본 적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긴, 본인은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 “그냥 쓰던 걸 계속 쓰고 싶다는 건가.” “그렇지. 일종의 관성처럼. 그리고 핸드폰 바꾸는 것보다 번호 바꾸는 게 더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해.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좀 더 그..
멀리서 드릴이 돌을 깨는 희미한 소리가 들린다. 산이 끈질기게 으르렁댄다. 이곳은 장례(葬禮)의 문턱이다. 관리자가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다. “어, 그 사이 많이 자랐네.” 잠깐 동안 엄마와 이모는 입구 옆에 놓인 화분을 구경한다. 사라졌던 관리자가 들어오라 손짓한다. 우리는 복도를 걷는다. 고령화의 지린내와 베이비파우더가 섞인 눅눅한 냄새가 바닥을 기어 온다. 텔레비전 연속극 소리와 아기처럼 우는 어른의 소리가 천장을 기어간다. 우리는 병실에 들어선다. 1937년생 병명: 당뇨, 뇌경색, 신경통 참고: 연하곤란(dysphagia), 관절운동, 보청기관리, 체위변경, 통풍 이곳은 늙은이들이 누워있는 곳이다. 우리 할머니처럼. 이모와 엄마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을 건다. 눈을 뜬 할머니더러 말해보라고. ..
0. 사물(事物)은 딱딱한 명사가 아니다. 명사처럼 보일뿐이지 파면 팔수록 사물에서 어떤 것이 넘쳐흐르고 팽창하는데, 그것은 형용사도 있고 동사도 있는, 복합적인 이야기다. 이야기 안에는 논리와 오감과 정서가 있다. 문제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물은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문신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볼까, 학교 첫날에 석유 냄새를 맡았다면 석유를 보고 맡을 때마다 학교 첫날이 생각나는 식이다. 1. 크리스토퍼 아이셔우드, 『싱글맨』, 조동섭, 그책, 2009. 2. 박완서, 『그 남자네 집』, 현대문학, 2008. [싱글맨] 1.1 짐(Jim)은 죽었고 조지(George)만 남았다. 아침, 조지가 잠에서 깨면 가만히 누운 채 천장을 보다가 벌거벗은 채 욕실로 비틀비틀 걸어간다. 소변..